매뉴얼은 아무도 읽지 않아서
사용 설명서 대신 책 한 권을 만든 이야기
깨달음: "사용법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용법 뒤에 있는 결정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론칭 직전의 할 일 목록에는 이상한 항목이 하나 있다. 코드도 아니고 디자인도 아닌데, 계속 뒤로 밀리는 것. 매뉴얼이다.
서비스를 만들었으면 사용법을 알려줘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매뉴얼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는데, 첫 문장을 쓰기 전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매뉴얼을 읽은 적이 있나?
없다. 정확히는, 거의 없다. 새 서비스에 가입하면 "시작 가이드"가 뜨고, 나는 그것을 닫는다. 궁금한 게 생기면 검색하고, 검색해도 안 나오면 포기한다. 매뉴얼은 만드는 사람의 성실함을 증명하는 문서이지, 읽는 사람을 위한 문서가 아닐 때가 많다.
내 북마크 폴더에는 "나중에 읽을 것"이 300개쯤 있다. 다시 연 것은 2개다. 내가 만든 매뉴얼이라고 운명이 다를 리 없다.
그래서 AI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매뉴얼을 쓰지 않고 사용법을 전하는 방법이 있을까?"
이번에는 회의를 시켰다. 북디자이너, 에세이 작가, SaaS 기획자, 마케터 — 네 명의 가상 전문가에게 같은 문제를 보여주고 각자의 답을 받았다. 혼자 일하는 사람의 특권이자 꼼수다. 회의실 없이 회의를 할 수 있다.
네 명의 답은 한 지점에서 만났다. 기능을 설명하지 말고, 결정을 들려줘라.
스택튜브에는 설명이 필요한 기능이 꽤 있다. 채널을 등록하면 새 영상이 분석되고, 노트가 쌓이고, 그게 옵시디언이나 킨들로 배달되고, 한 달치가 책으로 묶인다. 이걸 기능 순서대로 쓰면 매뉴얼이 된다. 그런데 각 기능에는 그렇게 만든 이유가 있다.
가령 무료 플랜의 분석 주기는 주 1회로 묶여 있다. 비용 때문만은 아니다. 매일 도착하는 노트는 어느 순간 읽지 않게 되고, 읽지 않는 노트가 쌓이는 건 유튜브 시청 기록이 쌓이는 것과 다를 게 없어서다. 월간 합본 전자책에는 광고도, 더 보기 링크도 넣지 않았다. 한 달의 끝에서만큼은 흐름이 끊기지 않는 읽을거리를 갖게 하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는 기능표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걸 알고 나면 서비스를 쓰는 방식이 달라진다. 사용법은 외우는 것이지만, 이유는 이해하는 것이고, 이해한 것은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매뉴얼 대신 책을 만들기로 했다. 규칙도 정했다.
장(章)의 단위는 기능이 아니라 장면이다. "채널 등록 방법"이 아니라 "첫 번째 노트가 도착하는 날". 제목에서 '매뉴얼'과 '가이드'라는 단어를 버렸다. 책의 이름은 「스택튜브를 읽는 법」이 됐다. 플랜 비교표나 설정 절차 같은 기계식 정보는 본문에서 추방해서 부록 한 곳에 모았다. 본문은 끝까지 에세이로 간다.
분량도 규율로 묶었다. 40~60페이지, 챕터당 4~6페이지. 매뉴얼은 두꺼워지는 순간 죽는다는 게 북디자이너 역할의 AI가 한 말이었는데, 반박할 수 없었다.
디자인은 새로 만들지 않았다. 스택튜브에는 매달 노트를 묶어 발행하는 월간 무크지가 있고, 그 디자인 시스템을 그대로 입혔다. 표지 색만 호박색에서 청록색으로 바꿨다. 그러니까 이 책은 독립된 문서가 아니라, 월간 시리즈의 0호 — 별권이다. 본권과 같은 옷을 입은 책이 "이 서비스를 읽는 법"을 먼저 보여주는 구조.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한 권씩 만들었다. 번역이 아니라 각 언어로 다시 썼다. 그리고 세 권 모두 이 작업실에 놓아둔다. 가입하지 않아도 읽을 수 있다.
매뉴얼을 썼다면 사흘이면 끝났을 것이다. 책을 만드는 데는 그보다 오래 걸렸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사흘짜리 매뉴얼은 아무도 읽지 않았을 것이고, 이 책은 적어도 한 명이 끝까지 읽었다. 만든 나다. 그리고 만든 사람이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문서라면, 다른 누군가도 읽을 가능성이 있다.
🔧 이 에피소드의 기술 용어 해설
온보딩 (Onboarding) 새 사용자가 서비스에 처음 적응하는 과정. 보통 "시작 가이드"나 화면 위 말풍선 투어로 구현된다. 이 책자는 온보딩 투어를 글로 대체하려는 시도다.
무크지 (Mook) Magazine + Book. 잡지처럼 발행되지만 책처럼 묶이는 출판물. 스택튜브의 월간 합본 전자책이 이 형식을 따른다.
별권 (Companion Volume) 시리즈 본권에 딸린 부속 책. 0호로 매겨 시리즈의 입구 역할을 한다. 본권과 같은 디자인을 입어야 "같은 시리즈"라는 신호가 된다.
트랜스크리에이션 (Transcreation) 직역이 아니라 각 언어의 독자에게 같은 효과가 나도록 다시 쓰는 번역. 한국어판의 농담이 일본어판에서는 다른 농담이 될 수 있다.
「스택튜브를 읽는 법」 — Companion 1.0